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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 조사

 

김해읍성지시굴조사

부서명
문화재조사팀
작성자
문화재조사팀
작성일
2009-10-20
조회수
416
시작일
199806
종료일
199807
내용
조사지역은 경남 김해시 동상동 824번지일대로, 김해시의 동상 상설시장 소방도로 개설공사 구간내에 김해읍성지의 성벽 일부가 포함됨에 따라 1998년 6월 8일부터 1998년 7월 8일까지 약200여평을 조사하였다.
시굴조사에서 성벽의 외벽은 지면에 장방형의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기단석을 쌓은 다음 그 위로 성벽석을 축조한 형태로 조사되었다.
지대석은 가로 80cm*세로60cm 정도 크기로 대체로 석재를 눕혀쌓기를 하였으며, 기단석과 성벽석에 비해 잔돌끼움이 거의 없는 상태이다. 기단석은 지대석의 끝에서 약 25cm정도 뒤로 물리어 쌓았는데 가로 70cm*세로 40cm 크기의 화강암으로 눕혀쌓기 하였으며 석재의 수평을 유지하기 위하여 하부의 지대석과 좌우 석재의 틈사이에 5cm~20cm 크기의 잔돌을 끼워쌓았다. 성벽석도 기단석의 끝에서 안으로 약 20cm 정도 안으로 들여서 쌓았는데, 지대석이나 기단석보다 훨씬 큰 가로 1m~1.6m, 세로 1m정도 크기의 석재를 이용하여 쌓았다. 지대석을 포함한 성벽의 잔존 높이는 1.6m로써 동쪽 끝에 남아 있는 잔존 성벽의 높이를 더하면 3.6m에 이른다.
외벽과 내벽사이에는 50cm 내외의 석재로써 뒷채움되어 있는데 거의 유실되고 바닥만 남은 상태이다. 외벽에서 약 8m 지점에서 내벽이 확인되는데, 거의 멸실된 상태로 외벽과는 달리 50cm 내외 크기의 방형석재로 축조하였고, 1정도 잔존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 1단석의 하부에 약 25cm 두께의 판석이 깔려 있다. 그러나 이 판석은 백자편이 나오는 암갈색부식토 위에 축조되었고, 외벽과 내벽사이에서 확인되는 판석에 비하여 그 높이가 낮다. 또한 외벽에서 내벽쪽으로 7m지점에서 성벽과 나란한 석렬이 확인되고 있어 증축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조사과정에서 출토된 유물은 토기편과 도자기편, 평기와편 들로서, 기와편중에는 '수면(水○面)'명이 보이는 것도 있어 조선초기 면리제(面里制)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세종실록","신증동국여지승람","경상도읍지" 등 김해읍성지에 관한 기록으로 볼때 김해읍성은 세종 16년(1434) 석성으로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문종 원년(1451) 삼도체찰사 정분의 서계에 의하면 당시 읍성은 주위 4,418척, 높이 13척, 여장높이 2척, 적대 20개, 옹성문 4개, 여장이 931개소 였으며, 성내에는 냇물이 한곳, 우물이 28곳, 해자의 둘레는 4,683척이라 하였다.
김해읍성은 기록으로 보아 세종 16년(1434) 석성으로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초축과 관련된 토층에서 출토된 상감분청 등 유물의 출토 양상으로 보아도 조선초기로 편년되고 있다. 한편, "증보문헌비고" 등 각종 기록에서도 폐성에 대한 언급이 없고 증축과 관련된 층에서도 백자편이 집중적으로 조사되어 20세기초까지도 성곽으로서 그 기능을 유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금번 조사에서 김해읍성의 전체 규모와 성벽의 축조수법이 조사되어 읍성의 복원 기초자료를 확보하였다는데 의의가 크며, 성외

자료관리 담당자

문화재조사팀
김정훈 (051-610-7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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