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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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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래남문비(東萊南門碑)(제21호)

    Title

    분류명
    부산광역시지정기념물
    소장품명
    동래남문비(東萊南門碑)(제21호)
    내용

    이 비석은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남문에서 왜적의 대군과 싸우다 순절하신 부사 송상현공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현종11(1670)에 당시의 격전지인 남문 밖 농주산에 세운 비석이다. 그 후 숙종 14(1688)에 부사 이덕성이 중창하고 숙종 35(1709)에 부사 권이진이 충렬사에 별사(別祠)를 세울 때 별사 앞뜰로 옮겨 왔으나, 영조12(1736) 별사를 없애게 되자 동래성 남문 자리로 옮겨 세웠다. 현재는 시립박물관 야외 전시장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비문에는 부산지방의 임진왜란 순절사적이 적혀 있으며, 당시 정계, 학계의 저명한 원로들이 참여하였는데 글은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썼으며, 전자(篆字)는 이정영이 썼다. 비석의 비두석(碑頭石)에는 쌍용조각이 있고 대석(台石)은 없어졌다. 현재 비석은 크게 파손되고 비면에 새겨진 기록은 거의 떨어져 상부에 약간이 글만 남아있으나 필사본으로 그 내용이 전해져, 그 옆쪽에 원래대로 복원한 동래남문비를 전시하고 있다.

    높이: 225cm 너비: 121cm

  • 약조제찰비(約條制札碑) (제17호)

    Title

    분류명
    부산광역시지정기념물
    소장품명
    약조제찰비(約條制札碑) (제17호)
    내용

    숙종 9(1683) 동래부사와 대마도주가 왜관의 운영을 위한 금제조항 5가지를 정하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출입을 금한 경계 밖으로 나오는 자는 크고 작은 일을 논할 것 없이 사형으로 다스린다. 2. 노부세(뒷돈)를 주고 받는 것이 발각되면 준 자, 받은 자 모두 사형으로 다스린다.

    3. 개시하였을 때 각 방에 들어가 몰래 암거래하는 자는 피차 사형으로 다스린다.

    4. 일본인은 5일마다 여러 가지 물건을 공급할 때 아전, 창고지기, 통역 등을 일체 끌어내려 때리는 일이 없도록 한다.

    5. 피차 범죄인은 왜관 문 밖에서 함께 형을 집행한다.

     

    임진왜란으로 폐쇄되었던 왜관이 선조 40(1607) 부산의 두모포(현재의 수정동 부근)에 다시 설치되자 밀무역과 잡상행위 등 왜인들의 각종 범법행위가 횡행하였는데, 숙종 4(1678) 초량(현재의 용두산 일대)으로 왜관을 옮긴 이후에는 더욱 심해져 폐단이 많았으므로 이를 바로잡기 위해 금제조항을 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측은 한문으로, 일본측은 일문으로 새긴 비석을 수문 안과 왜관 경계선에 각각 세웠는데, 이때 조선측에서 세운 비석이 이 약조제찰비이다. 현재 비신만 남아있는 상태로, 비신 상부가 둥근 형태인 것으로 미루어 원래부터 비석머리에 올리는 이수나 귀부는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재료는 화강석을 사용하였다. 원래 초량왜관이 있었던 용두산 공원 동쪽에 있던 것을 부산시립박물관으로 옮겨와 야외정원에 전시하였으나 현재는 박물관 전시실 내로 옮겨 전시 중이다.

    높이: 140, 너비: 68

     

     

자료관리 담당자

유물관리팀
조재용 (051-610-7137)
최근 업데이트
2023-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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