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류명
- 보물
- 소장품명
- 이덕성 초상 및 관련유물 일괄
- 내용
2006년 12월 29일 보물 제1501호로 지정된 '이덕성 초상 및 관련유물 일괄'은 이덕성 초상을 비롯하여 백패(白牌)·홍패(紅牌)·교서(敎書)·유서(諭書)·교지(敎旨)·교첩(敎牒)·시권(試券)·자의대비옥책(慈懿大妃玉冊)·봉래별장첩(蓬萊別章帖)·헌릉대왕신도비명(獻陵大王神道碑銘) 등으로, 모두 조선 숙종조 문신 이덕성과 관련된 유물121점이다. 이덕성(1655~1704)의 자는 득보(得甫), 호는 반곡(盤谷)이다.
전주(全州) 사람으로 정종대왕의 열 번째 왕자 德泉君 李厚生의 8대손이며 함풍군(咸豊君) 이유간(李惟侃)의 직계후손이다. 1677년(숙종 3)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82년(숙종 8) 춘당대시에 병과로 급제하고, 동래부사·해주목사·병조참지·의주부윤·황해도관찰사·충청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대표적 유물인 〈이덕성 초상〉은 전체 길이 250㎝, 너비 114㎝의 족자 형태로, 화폭은 길이 166㎝, 너비 99㎝이며 앉아있는 인물의 높이가 145㎝인 대작이다. 화면의 오른쪽 가장자리에 “忠淸觀察使李公諱德成字得甫畵像 完山人號盤谷乙未生甲申卒四十二歲時眞(이름은 덕성이고 자는 득보인 충청도관찰사 이공의 초상이다. 완산(전주) 사람으로 호는 반곡이며 을미년(1655, 효종 6)에 출생하여 갑신년(1704, 숙종 30)에 사망하였으며, 42세 때의 진영이다)"라는 화제가 적혀 있다. 인물은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의 자세로 교의(交椅)에 앉은 모습이다. 높은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녹색 단령포(團領袍)을 입고 있다. 얼굴은 가는 선묘를 사용했으며 홍조를 표현하고 명암을 살짝 가했다. 육리문(肉理文)은 없으며 수염이 길고 구불거리게 묘사되어 있다. 비교적 가늘고 짙지 않은 먹선으로 윤곽과 의습선을 표현하였고 명암을 조금씩 가했다. 쌍학흉배(雙鶴胸背)는 밝은 녹색 바탕에 단정학과 오색구름을 세필로 화려하게 그렸고, 삽화금대(揷畵金帶)도 정교하게 묘사하였으며, 짙은 먹으로 묘사된 교의(交椅)를 덮고 있는 표범 가죽은 가늘고 구불구불한 선으로 사실적으로 그렸다. 정형화된 공신도상(功臣圖像)으로부터 보다 자연스런 형식으로 변모해 가던 18세기 초엽의 정교한 작품으로 당시 초상화 연구에 중요한 사례이다. 한편, 『자의대비옥책』은 1687년(숙종 13) 만수전 화재로 훼손된 것을 개수할 때 이덕성이 새로이 서진한 것이며, 『봉래별장첩(건·곤)』은 동래부사 재임시절인 1688년 相臣·관직자·문인·명사·친척 등 수많은 인사들의 경하문과 격려문을 모은 서간문집이다. 이외에 이덕성 백패·홍패·교서·유서·교지·교첩·시권 등 이덕성 관련 고문서는 이덕성 전기 자료로서의 사료적인 가치와 조선 후기 인사·행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며, 헌릉신도비명(獻陵神道碑銘)·문사발우(文史拔優)·반곡공수묵(盤谷公手墨) 등 그의 필적도 왕실 유물 및 서예사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현재 부산박물관에는 이덕성과 관련된 유물로 그의 동래부사 재임 시절인 1688년(숙종 14) 중창한 〈동래남문비(시지정 기념물 제21호)〉와 <이덕성가 문적(시지정 유형문화재 제84호)>가 있다.
◎ 규격: 167cm × 99cm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