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구(尹用求, 1853~1939)는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주빈(周賓), 호는 석촌(石村)·해관(海觀)·수간(睡幹)·장위산인(獐位山人)으로 남녕위 의선(宜善)의 아들이다. 1871년(고종 8) 직장(直長)으로서 문과에 등제하여 벼슬이 예조·이조판서에 이르렀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에는 법부, 탁지부, 내무대신에 10여 차례나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절하고, 서울 근교 장위산 밑에서 은거하였다. 해서․행서․금석문을 즐겨 썼으며, 난죽을 잘 그렸다.
난초와 대를 그릴 때 잎사귀 끝을 아래로 향하게 하는 도수란(倒垂蘭), 도수죽(倒垂竹)을 즐겨 그렸으며 포물선 구도를 선호하였다. 이 묵란도는 도수란의 형태는 아니지만 뭉툭한 난엽의 표현과 말단부의 먹점에서 윤용구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 화면 우측 하단에 ‘石村退樵’라는 관지를 쓰고 ‘尹用求印’, ‘癸丑生’ 2과를 찍었다.
◎ 시 기 : 19세기 후반~20세기 초
◎ 규 격 : 세로 33.2cm, 가로 22.0cm,
◎ 재질현상 : 종이에 수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