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 북구 만덕동 산 30번지에 있는 만덕사지에 관한 발굴조사는 이미 1990년 우리 박물관에서 동서 길이 24.9m, 남북길이 20.4m인 금당지로 추정되는 부분을 발굴조사 하였다. 이번 조사는 1차발굴에서 조사되지 않은 부분에 대하여 북구청으로부터 학술조사 의뢰가 있어, 현재 공지로 있는 금당지 앞쪽에 탑지나 부속건물지가 있을 것으로 이에 대하여 확인을 하고, 또 건물을 짓기 위한 땅의 정지방법을 확인하기 위하여 실시하였다. 그러나 발굴조사 결과 관련 유구는 전혀 확인되지 않았고, 용도불명의 기단과 파괴된 기와 구덩이만 확인되었다. 구덩이 내부에는 절이 폐사된 후 물의 흐름에 위해 그 후 절터를 사용하면서 정지하기 위하여 기와를 메꾼 것으로 보인다. 구덩이 내무에 절터와 관련된 가공된 석조물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절차가 완전히 파괴되기 전에 이루어진 구덩이로 보인다. 1차 조사시 확인되지 못한 금당지 초축기단이 확인되었다. 남쪽 중앙부에서 너비 5.5m의 계단지가 확인되었으나, 이미 파괴가 심하여 정확한 규모를 알 수가 없다. 2차 기단 축조시 대부분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정지를 위해 복토의 흙을 정지한 결과 남서쪽으로 내려가는 경사지에 서남쪽을 복토하여 정지한 것이 확인되었다. 정지작업은 2차 기단 축조시 완료되었으며, 기와 구덩이는 그 후에 형성된 것이다. 2차 발굴에서 출토된 유물은 암막새, 수막새, 평기와 등 1차때의 유물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주목되는 것은 대형 치미로 고려시대 치미 중 가장 큰 것으로 추정되는 너비 100cm, 높이 50cm 이다. 완전한 형태는 아니나 황룡사 출토 치미와 같이 결합식 치미로 보인다. 1990년 1차 발굴 때와 마찬가지로 『祇毗寺』명의 기와가 출토되었으며, 이외에 『佛房』,『寶』명의 기와편도 출토되었다. 만덕사지는 종래 고려시대 절터로만 알려져 왔으나, 명확한 기록이 없어 이 절터에서 출토된 각종 기와와 석조유물의 양식으로 보아 창건연대는 고려초 또는 통일시대말일 가능성이 있다. 또한 폐사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이며, 조선시대 최고의 기록인 지리지에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고려말에 폐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 이 절터는 만덕사지라고 불리고 있으나, 1843년도에 완성된 김정호의「청구도」채색사본과 1861년에 완성된「대동여지도」에는 현재의 만덕고개를 기비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단지 우리 박물관 소장의 1890년 제작된 부산의 고지도에서 만덕고개를 만덕령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만덕사지는 1890년 이후의 지명에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되며, 이 절의 명칭이 만덕사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명문기와에 새겨진 것처럼 이 절의 원래 명칭은「기비사」일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