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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증유물

부산박물관 주요기증유물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이덕성가 문적

이덕성가 문적

'이덕성가 문적'은 조선 후기 선비 반곡공 이덕성 가문의 유물 9종 12책의 고서와 67매의 고문서 등 79점이다. 이덕성 가문은 조선 제2대 정종의 열 번째 아들인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5대손 함풍군(咸豊君) 이유간(李惟侃)의 후손이다. 정치적으로는 소론이며 학문적으로는 양명학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조선 후기에는 강화학파를 형성하였으며, 학문 · 예술적으로 뛰어난 육진팔광(六眞八匡)을 배출하는 등 조선 중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조선조 사회에 정치 · 학술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집안이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이덕성의 종조부인 이경석의『백헌필첩(白軒筆帖)』, 부친인 이후영(李後英)의 『참판공집(參判公集)』, 장자인 이진원(李眞源)의 『시직공유묵(侍直公遺墨)』, 손자인 이광려(李匡呂)의『선집(先集)』과『참봉공집(參奉公集)』, 재종손으로 문장과 글씨로 이름을 날린 이광사(李匡師)의『원교집(圓嶠集)』, 삼종현손인 이면백(李勉伯)의 『대연유고(垈淵遺稿)』등이다. 이들 문적들이 시기적으로는 17~19세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물 제1501호 ‘이덕성초상 및 관련자료 일괄(李德成 肖像 및 關聯資料 一括)’과 관련된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있다.
이덕성초상 및 관련유물 일괄

이덕성초상 및 관련유물 일괄

보물 제1501호 〈이덕성 초상 및 관련유물 일괄〉은 이덕성 초상을 비롯하여 백패(白牌)·홍패(紅牌)·교지(敎旨)·시권(試券)·자의대비옥책(慈懿大妃玉冊)·봉래별장첩(蓬萊別章帖)·헌릉대왕신도비명(獻陵大王神道碑銘) 등 조선 숙종조 문신 이덕성(李德成, 1655~1704)과 관련된 유물 121점이다. 대표적 유물인 〈이덕성 초상〉은 전체 길이 250㎝, 너비 114㎝의 족자 형태로, 화폭은 길이 166㎝, 너비 99㎝이며 앉아있는 인물의 높이가 145㎝인 대작이다. 화면의 오른쪽 가장자리에 “忠淸觀察使李公諱德成字得甫畵像 完山人號盤谷乙未生甲申卒四十二歲時眞"라는 화제가 적혀 있다. 인물은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의 자세로 교의(交椅)에 앉은 모습이다. 높은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녹색 단령포(團領袍)을 입고 있다. 얼굴은 가는 선묘를 사용했으며 홍조를 표현하고 명암을 살짝 가했다. 육리문(肉理文)은 없으며 수염이 길고 구불거리게 묘사되어 있다. 비교적 가늘고 짙지 않은 먹선으로 윤곽과 의습선을 표현하였고 명암을 조금씩 가했다. 쌍학흉배(雙鶴胸背)는 밝은 녹색 바탕에 단정학과 오색구름을 세필로 화려하게 그렸고, 삽화금대(揷畵金帶)도 정교하게 묘사하였으며, 짙은 먹으로 묘사된 교의(交椅)를 덮고 있는 표범 가죽은 가늘고 구불구불한 선으로 사실적으로 그렸다. 정형화된 공신도상(功臣圖像)으로부터 보다 자연스런 형식으로 변모해 가던 18세기 초엽의 정교한 작품으로 당시 초상화 연구에 중요한 사례이다.
금동보살입상

금동보살입상

통일신라시대에는 백제와 신라의 불교조각 전통 위에 새로이 수용되는 중국 당나라 및 인도, 서역과의 문화교류로 불교 미술의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가장 국제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불교조각도 신체비례에 균형이 잡히고 얼굴의 세부표현이나 몸체의 양감 및 사실적인 옷주름 처리, 정교한 영락 장식의 표현 등에서 뛰어난 조각솜씨를 보여준다. 이 시기 보살상에 나타나는 변화는 자세에서 삼굴(三屈)의 자세를 취하며, 천의가 삼국시대처럼 앞에서 X자형으로 교차하지 않고 자유롭게 표현되었다. 통일신라 후기가 되면 금동불 제작이 줄어들고 조각수법은 이전 시기보다 쇠퇴하는데, 석불과 마애불의 조성과 함께 새로이 철조불상의 조성이 증가하여 고려 초까지 각 지역에서 널리 제작되었다. 이 보살상은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금동볼살입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사실에 충실하면서 관능미에 흐르지 않고 자비와 위엄을 갖춘 상으로 8세기 중엽 이후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청동소탑

청동소탑

현재까지 사리장엄구가 발견된 탑은 목탑으로는 법주사 팔상전이 유일한 예이며 중요한 발견은 모두 석탑에서였다. 그 대부분 신라시대 석탑이고 고려시대 석탑으로는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광주 구동 오층석탑이 있을뿐이다. 사리는 녹색 유리병에 넣은 예가 가장 많고 이 사리병을 포함하는 장엄구들이 함께 봉안된다. 장엄구의 형식에는 특별한 격식이 없으나 전각형(殿閣形)이 가장 많다. 이 사리기편도 전각형 사리기의 일부로 비교적 형식을 지니고 있으며, 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김정희 유묵

김정희 유묵

김정희의 유묵으로 행서대련이다.
동산서재에 걸어둠, "문확으로 종횡함은 각기 천성대로이나, 금석에 글과 그림 등을 새기는 것은 신이 능히 할 수 있다." 일찍이 소재와 석암이 여러번 써둔 것을 보았는데, 그구절 모두는 비록 삼십년이 지나서도 오히려 신령한 빛이 눈에 있는 듯 하다. 감히 망령되이 할 수는 없으나 베껴도 추모코져 할 따름이다. 이는 단파거사의 것이다.
어전준천제명첩

어전준천제명첩

이 첩은 영조 36년 (1760)에 실시한 지금의 청계천 준설 공사를 역사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 청계천은 민가에 흘러 들어온 오물과 토사 등으로 인하여 심한 악취는 물론이고, 이로 인한 홍수와 수해의 우려가 있었다. 이에 영조는 국가적인 시책의 일환으로 준설 공사를 실시하게 된다. 공사가 완료된 후 (공사개시 57일 후) 영조는 춘당대에서 입시한 여러신하들에게 시사를 행하고, 力,字와 國,字을 운으로 사언시를 짓게 하였다. 이 때 지어진 시와 준설장면을 그린 그림을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이 바로 이 "어전준천제명첩" 이다. 이 첩의 순서는 준천소좌목, 2장의 그림, 어제, 신하, 16명의 시 순서로 되어있다.
청자상감국화문화형병

청자상감국화문화형병

상감은 원하는 문양을 파낸 후 그 안에 백토와 자토를 감입하는 기법으로 번조하면 백토는 백색, 자토는 흑색으로 변한다. 이러한 상감기법은 고려시대 중기인 12세기부터 후기인 14세기까지의 청자와 조선시대인 15세기에도 분청사기의 장식기법에 이용되었다. 이 유물의 태토는 기포와 모래가 있어 표면이 거칠지만 양호하다. 빙렬은 없으면 유색은 황갈색을 띠고 있다. 나팔형의 넓은 입부분에서 목부분으로 줄어들다가 몸통부분에서 팽만하고 굽부분에서 밖으로 벌어진 병이다. 목부분의 윗면에 는 학이 두 마리, 밑면에는 새로로 여러 곳을 구획한 후 그 안에 세 개의 연주문을 백상감 하였다. 어깨부분에는 백상감의 여의두문대가 있으며 그 아래에는 文표라는 글자를 흑상감 하였다. 몸통에는 세로로 네 곳을 구획한 후 그안에 국화,모란,학을 흑백상감 하였다. 몸통의 밑면에는 연판문대를 돌렸고 굽의 바깥면에는 음각선문을 시문하였다. 굽바닥에는 유약을 닦아낸 후 모래를 받쳤다. 도식화된 문양요소, 모래받침 등의 고려후기 상감청자의 특징이다.
분청상감어문매병

분청상감어문매병

매병은 수액을 담는데 사용한 병의 일종이다. 매병은 고려시대 전기인 11세기부터 후기인 14세기까지 청자로 만들어졌으며 조선시대인 15세기에도 분청사기로 제작되었다. 이 매병의 형태는 고려시대의 매병과 비슷하나 몸통의 아랫부분이 더욱 들어가 S字形을 하고 있다. 태토는 잡티와 모래가 섞여 있으나 양호하다. 일부 유약을 입히지 않은 곳이 있으며 유색은 회녹색을 띠고 있다. 어깨부분에는 연판문대와 당초문대를 돌렸다. 몸통의 중앙부에는 큰 물고기와 작은 새를 그 아래에는 상하로 세 줄의 선을 돌린 다음, 그 내부에 파초문을 시문하였다. 굽은 안굽이며 모래를 받친 흔적이 있다. 입부분과 몸통 아랫부분의 일부를 수리하였다. 상감기법은 15세기 분청사기에 많이 사용한 장식기법이다.
방격규구사신경

방격규구사신경

동경의 출토지는 김해 양동리로 알려져 있으며, 20여 조각으로 깨어지고 일부 결실되어 있으나 유물 상태는 양호하다. 동경의 가운데에 뉴를 중심으로 방형의 문양대가 있으며 그 내부에는 사엽좌와 12字의 명문대가 있다. 동경에 있어서 그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내구에는 현무, 주작, 백호, 청룡의 사신도와 T,L,V자 모양의 기하학적인 문양이 배치되어 있고, 그 바깥에 명문대와 집선문대가 돌아가고 있다. 주연에는 삼각거치문과 당초문이 베풀어진 형태이다. 이 같은 형식의 동경은 소위 방격규구사신경으로 불리어지는 것으로 중국 왕망의 신을 중심으로 전한 말부터 후한까지 유행했던 동경의 하나이며 기원 1세기의 제품으로 추정된다.
쌍조문수막새

쌍조문수막새

기와는 목조건물의 지붕에 이어져 눈과 빗물의 누수를 차단하고 이를 흘러내리게 하여 지붕을 결구하고 있는 목재의 부식을 방지함과 동시에 건물의 경관과 치장을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본격적으로 기와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조선시대까지 많은 변천을 겪으면서 사용되고 있으며, 지붕에 사용되는 위치에 따라 모양과 명칭이 다르고 종류도 다양하다. 사용처와 형태에 따라 평기와, 막새, 서까래기와, 마루기와, 특수기와 등 20여종이 넘는다. 막새는 암/수기와의 한쪽 끝에 문양을 새긴 드림새를 덧붙여 제작한 것으로 목조건물의 처마 끝에 사용되는 무늬기와이다. 수막새는 막새와 수기와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지며 막새는 가장자리 부분을 주연이 있고 주연 안쪽에 연판이 있으며 연판 안쪽에 자방이 있고 자방안에는 연자가 있다. 수막새는 삼국시대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으며, 주연/연판/자방 등의 문양에 따라 시기적인 차이가 있다. 이 수막새의 태토는 점토성이며 색조는 흑회색이고 소성은 양호하다. 주연에는 연주문을 규칙적으로 배치하고 막새면에는 중앙에 꽃을 배치하고 좌우에 1쌍의 새를 배치하였다. 막새의 문양형태 및 제작기법으로 보아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기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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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업데이트
2018-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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