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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 조사

 

기장 장안사 정비사업부지 내 문화재 발굴조사

부서명
문화재조사팀
작성자
문화재조사팀
작성일
2015-03-20
조회수
810
시작일
2014-08-06
종료일
2015-02-27
내용

우리박물관은 기장군 장안읍 장안리 불광산 자락에 위치하는 장안사 사역에 대한 매장문화재 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정밀 발굴조사를 시행하였다. 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건물지 15기를 비롯하여 담장지 6기, 암거시설 3기, 배수구 3기, 축대 2기, 석열 1기, 석축시설 2기, 집석시설 2기, 수키와열 1기 등 총 33기의 생활 유구가 확인되었다.

 

장안사는 대웅전(보물 제1771호)과 대웅전 석조석가여래삼불좌상(보물 제1824호)을 비롯하여 응진전 석조석가삼존십육나한상(시지정 유형문화재 85호), 명부전 석조지장시왕상(시지정 유형문화재 86호) 등 다수의 문화재가 등록되어 있는 전통 사찰이다. 장안사 창건 시기는 신라 문무왕 13년(673)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쌍계사라 하였으며, 신라 애장왕이 다녀간 뒤 장안사라 하였다. 이후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전기까지 역사기록은 확인되지 않으며, 임진왜란 이후인 인조 8년(1631)에 의월대사가 중창하고 인조 16년(1638) 태의대사가 중건하였다. 이어 효종 5년(1654) 원정・학능・충묵스님에 의해 대웅전이 중건하였다고 전한다. 오정(鰲亭) 김방한 선생(1635~1697)의 문집 중 「長安寺大雄殿記」에 따르면, 대웅전 중수 기록이 1657년으로 명시되어 있으며, 대웅전 종도리의 묵서명에서도 동일한 시기가 확인되어 범어사 대웅전(보물 434호)보다 23년이나 앞선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매장문화재 발굴조사는 산신각・응진전 동쪽 일대와 요사채로 사용하던 해동전 부지에 대하여 실시하였다. 조사대상지는 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전체 사찰 범위 중 좁은 면적임에도 불구하고 통일신라시대 후기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건물지가 각 시기별로 중복관계가 복잡하게 나타난다. 통일신라시대 건물지는 현재의 장안사 건물 배치와 다른 축을 보이고 있는 점이 특징이며, 기단과 초석 하부의 적심은 매우 양호한 상태로 잔존한다. 건물지는 대웅전을 기준으로 서쪽 방향으로 10~12° 정도 틀어진 상태로, 조선시대에 중창된 사역과는 다른 가람을 구성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조선시대 전기 건물지는 현재의 대웅전과 축이 동일하며, 후기까지 그대로 유지된다. 그 중 3호 건물지는 조선 전기에 수축되어 후기까지 존속하던 건물지이다. 규모는 길이 16m, 너비 6m 정도로 이번 조사에서 가장 큰 건물지이다. 건물지를 구성하는 기단과 적심이 양호한 상태로 잔존하며, 배수시설・아궁이・온돌 등 부속시설이 확인되었다. 기둥을 받치던 적심과 배수구에서는 3차례 이상의 개・보수 흔적이 확인된다.

 

이번 조사에서 출토된 「順治 4年(1647)」 명문기와는 장안사 대웅전 중수 시기보다 10년 앞선 유물로써 장안사가 본격적으로 중창되는 시점에 해당하는 유물이다. 명문기와가 출토된 층위를 기준으로 형성된 건물지 배치를 통해 장안사 대웅전을 중심으로 동쪽 사역에 대한 복원이 가능해졌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의가 있다. 또한, 장안사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다양한 분청사기와 백자는 장안사 인근에 위치한 상장안・하장안유적에서 출토된 자기와 특징이 거의 동일하다. 장안 지역에서 생산한 자기를 수급받아 사용했던 것으로 지역 도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자료관리 담당자

문화재조사팀
김정훈 (051-610-7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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